철학적인 척 해보았따./아니메다 뿌!

이브의 시간, 마주침을 통한 관계에 관하여

도로보네코 2011. 12. 21. 01:53

 

이브의 시간, 마주침을 통한 관계에 관하여

  (철학적인 척 해보았따!)

 

 

서론

미래, 아마도 일본. “로봇”이 실용화된 지 오래, “안드로이드”가 얼마 전 실용화된 시대.’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 이브의 시간(Time Of Eve, 2010)을 보았다. 이 작품은 미래를 배경으로 평범한 고등학교 소년 리쿠오가 ‘본점에서는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특이한 규칙을 지닌 ‘이브의 시간’이란 카페에 들어서면서 스토리가 시작된다.

평상시의 안드로이드는 감정이 없는 무표정과 머리 위에 링을 통하여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차이를 구분한다. 이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구분이 사라질 정도로 발달한 상황 속에서 일부러 인간과 기계를 ‘구별짓기’ 위한 기제로 작동한다. 이는 로봇공학자 모리 마사히로(森 政弘)가 주장한 섬뜩한 계곡현상(不気味の谷)의 느낌을 인간이 극복했음에도 작위적으로 계곡 속에 안드로이드를 안주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차이 속에서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브의 시간이라는 담론공간의 특수성

 

이와 같은 구별짓기를 우리는 생활세계에서 활동할 때 사회가 용인하는 인식을 무반성적으로 그대로 수용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사회가 인정하는 시각-작품 속의 도리계(ドリ系)에 대한 거부반응이나 윤리위원회의 견해-이 진리를 보장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사회가 지닌 특이성과 이해관계에 따라 한 시대의 사회적 견해가 만들어지고 교육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 과정 속에서 허용되는 견해가 통용되는 장소(분위기)를 담론이라고 일컫는다면 ‘이브의 시간’이란 주변의 수많은 카페 중 하나가 아닌 한 시대의 주류의 목소리가 들어나는 장소가 아니라 사회의 변두리에 속해 자신의 소리를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목 없는 자들이 소리를 내는 담론공간이다.

이 담론공간에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그 가능성을 만들어낸 카페의 주인 ‘나기’의 장소 속에서 리쿠오와 그 친구 마사키라는 인물이 카페의 인물들과 만나는 과정 속에서 그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사회적으로 허용이 되지 않는 이 공간에서 특수한 담론영역(코드네임: 1138)에 들어오게 되면 안드로이드의 흡사 인간과 같은 낯선 모습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낯섦=타자: 만남과 인식의 변화

 

이 낯섦의 규정을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려 ‘나와는 삶의 규칙이 다른’ 이와의 대면을 ‘타자’라고 정의한다면 리쿠오는 이때 사미와의 마주침을 통해서 이전에 형성되었던 ‘너는 ~였다.’라는 과거의 기억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리쿠오는 과거의 부자연스러운(不気味の谷) 사미라는 개념은 흔들리게 되고, 이 흔들림은 기존의 안정된 세계를 무너뜨리면서 최초로 사미를 아담에게서 낯선 대상인 이브, 즉 낯선 타자(여성)로 인식하게 되고 달라진 커피에 대해 사미와 이야기하며 얼굴을 붉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후 이브의 시간이라는 한 영역에서 우연적인 만남으로 발생한 마주침은 한 번으로 끝나는 사건이 아닌, 이후 또 다른 마주침을 유발한다. 카페에서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튜링테스트(Turing test)와 같은 상황에서 만나는 타자(시메이, 치에, 코지와 리나 등)와의 만남의 연속을 통해 이뤄지는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교류는 붕괴되어가는 리쿠오의 세계가 타자를 통한 새로운 인식을 통해 앞으로 인간과 안드로이드가 이뤄갈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세계로 인식을 새롭게 재구축하게 된다. 

 

 

결론: 논의의 확장

 

이런 시각에서 이브의 시간 속에서 그리는 풍경은 미래시대에 대한 우리의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인식이란 사유는 현재-작품자체는 미래를 그리나 그 작품을 만든 이와 관람하는 이는 근대인이기에-적 사유이다.

우리는 과거 일제시대의 지배국가와 피지배국가, 즉 식민지라는 역사성을 속에서 서로가 마치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외형적 구분이 불가능함에도 서로 나눠서 차별을 하듯이 일본과 조선이라는 국가적, 민족적 개념을 통한 차별과 폭력을 낳았던 것을 목격했다. 인류는 이런 차별과 구별짓기의 담론을 지속적으로 진행시켜 왔다.

이런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일본과 한국이라는 공동체의 상이한 역사적 기억의 구분이 차별이 아닌 즉 나와 다른 이의 ‘다름’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고 싶다는 이끌림. 이 감각을 지닐수만 있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가 맞이한 서로의 낯설음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극복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이 첫 마주침은 리쿠오가 새로운 타자로서 사미를 만났을 때보다 더 어색하고, 아담이 이브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낯설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언어라는 장벽과 역사라는 기억(민족성, 국민국가 이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에티카’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라고.

우리가 항상 누군가와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대면 하고 커뮤니케이션과 사회적 교환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불안감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이 처음의 두려움만 이겨낸다면 우리는 충분히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점이 만들어질 것이다.

 

(포스터 출처: 네이버 영화)

ps: 새벽에 쓰니 비몽사몽해서 잘 안써지네요 ㅜㅜ